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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챙김의 글/시 한편의 여유

가을 ‘단풍시’ 모음

by 늘해나 2021.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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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드는 날

-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단풍나무 아래서

- 이해인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다

문득 그가 보고 싶을 적엔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마음속에 가득 찬 말들이

잘 표현되지 않아

안타까울 때도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세상과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저절로 기도가 되는

단풍나무 아래서

하늘을 보면 행복합니다.

 

별을 닮은 단풍잎들의

황홀한 웃음에 취해

나의 남은 세월 모두가

사랑으로 물드는 기쁨이여

 

 

 

단풍잎에게

- 정연복

 

 

며칠 전까지도

허공에서 춤추었지

 

알록달록

눈부신 너의 존재.

 

이제 두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다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마다 텅 빈 가지뿐.

 

새봄부터 세 계절 동안

나의 눈 떠나간 너.

 

빛바래 대지에 누워 있는

차가운 네 몸

 

내 가슴속에 따뜻이 품을게

편히 잠들렴.

 

 

 

 

고운 빛깔로 물들어가요

- 유지나

 

 

우리

늙어 가지 말고

고운 빛깔로 물들어가요.

 

아픔의 흔적은 빨간빛으로

슬픔의 흔적은 노랑빛으로

고통의 흔적은 주황빛으로

상처의 흔적은 갈색빛으로

힘듦의 흔적은 보라빛으로

 

예쁜 꽃처럼 향기롭게

아름답게 물들어가요.

 

 

 

단풍의 이유

- 이원규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은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낙엽

- 김미애

 

 

떨어진다고 다 슬픈 건 아니다

바람의 박자와 공기의 리듬에 맞춰

덧없이 떠나려는가

 

한 생을 혼 불로 살아내고

기약없는 차편에 몸을 실어

어디론지 정처 없이 떠나는

방랑자여

 

버리는 것은 자유하는 것

죽어서 다시 태어날 생을 예약하고

갈 때를 알기에

한 점 그리움 뒤로 두고

초연히 사라지는

네 이름은 낙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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