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드는 날
-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단풍나무 아래서
- 이해인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다
문득 그가 보고 싶을 적엔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마음속에 가득 찬 말들이
잘 표현되지 않아
안타까울 때도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세상과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저절로 기도가 되는
단풍나무 아래서
하늘을 보면 행복합니다.
별을 닮은 단풍잎들의
황홀한 웃음에 취해
나의 남은 세월 모두가
사랑으로 물드는 기쁨이여
단풍잎에게
- 정연복
며칠 전까지도
허공에서 춤추었지
알록달록
눈부신 너의 존재.
이제 두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다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마다 텅 빈 가지뿐.
새봄부터 세 계절 동안
나의 눈 떠나간 너.
빛바래 대지에 누워 있는
차가운 네 몸
내 가슴속에 따뜻이 품을게
편히 잠들렴.
고운 빛깔로 물들어가요
- 유지나
우리
늙어 가지 말고
고운 빛깔로 물들어가요.
아픔의 흔적은 빨간빛으로
슬픔의 흔적은 노랑빛으로
고통의 흔적은 주황빛으로
상처의 흔적은 갈색빛으로
힘듦의 흔적은 보라빛으로
예쁜 꽃처럼 향기롭게
아름답게 물들어가요.
단풍의 이유
- 이원규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은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낙엽
- 김미애
떨어진다고 다 슬픈 건 아니다
바람의 박자와 공기의 리듬에 맞춰
덧없이 떠나려는가
한 생을 혼 불로 살아내고
기약없는 차편에 몸을 실어
어디론지 정처 없이 떠나는
방랑자여
버리는 것은 자유하는 것
죽어서 다시 태어날 생을 예약하고
갈 때를 알기에
한 점 그리움 뒤로 두고
초연히 사라지는
네 이름은 낙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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