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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챙김의 글/시 한편의 여유

사랑시 ‘그 여자네 집’ 김용택 시인

by 늘해나 2024.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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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네일 이미지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하얀 살구꽃 핀 풍경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눈 쌓인 풍경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작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한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던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쓸쓸한 들판 풍경

 
지금은 아, 지금은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 김용택 시집 < 그 여자네 집> (창비 펴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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