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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예술공간/미술 이야기

색채의 화가 ‘마르크 샤갈’ 생애와 그림

by 늘해나 2024.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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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 섬네일 이미지

 

 

색채의 화가 ‘마르크 샤갈’ 생애와 그림

 

▨ 샤갈에게 영감을 준 고향, 비테프스크

 

1887년 7월7일. 샤갈은 벨라루스공화국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났다. 9남매 중 첫째였다. 집은 가난했다. 게다가 유대인이었다. 러시아 영향권에 있는 이 땅에서도 유대인은 2등 시민이었다.

 

아버지는 청어 장수였다. 매일 생선 궤짝을 날랐다. 월급은 보잘것없었다. 비린내에 푹 젖은 20루블을 받는 정도였다. 훗날 샤갈은 아버지의 일을 놓고 "지옥 같은 일이었다"고 회상한다. 화가가 된 후에도 이 가여운 가장을 계속 추억한다. 그를 떠올리며 적지 않은 그림에 생선 도상(圖像)을 그리게 된다.

 

눈 떠보니 돈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게 샤갈의 처지였다. 그래도 어린 샤갈의 삶이 막 비루하지만은 않았다. 비테프스크에서 샤갈이 살던 곳은 유대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유대교 예배당에 가면 많은 이가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마을은 고요했다. 사람들은 소박했다. 동산과 실개천은 서정적이었다. 동물들은 맑은 하늘처럼 순했다. 샤갈은 시의 한 구절 같은 이 풍경 속에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그는 자서전에서 "내 그림 중 비테프스크로부터 영감을 받지 않은 작품은 한 점도 없다"고 고백했다.

 

아버지가 생선 장수였다면 어머니는 채소 장수였다. 어머니는 샤갈의 남다른 면을 알아보고, 샤갈이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수소문했다. 기본기가 꽤 탄탄한 유대인 화가도 소개해 줬다.

 

장남이니 집안일을 도우라고 샤갈에게 닦달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아버지를 도와 생선 궤짝을 옮기는 일도, 어머니와 함께 무를 뽑는 일도 거의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눈부신 재능을 쥐고도 소일거리만 하다 잊힐 수도 있을 터였다.

 

마르크 샤갈 (1887~1985)
마르크 샤갈(1887~1985)

 

 

 

▨ 운명의 여인, 벨라와의 만남

 

1906년. 샤갈은 러시아제국 수도이자 예술 중심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좋은 예술학교가 몰린 도시였다. 하지만 울타리를 벗어난 유대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샤갈은 친구에게 임시 통행증을 부탁했다. 유대인이기에 받아야 할 검문을 피하려면 이 증명서가 필요했다.

 

샤갈은 1908년부터 2년 정도 짜반체바 미술학교에 다녔다. 샤갈은 레온 박스트의 지도를 받았는데, 박스트도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박스트는 그 시절 러시아제국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작업 의뢰를 받을 만큼 성공한 예술인이었다. 반(反)유대주의 세계에 들어가자마자 받은 차별에 말까지 더듬게 된 샤갈은 그런 박스트가 대단해 보였다.

 

샤갈은 박스트를 본보기로 삼았다. 그를 보고 더 버티기로 했다. 샤갈은 고향을 떠올리며 농부, 염소, 산양, 닭, 생선 등을 자주 그렸다. 나름의 '힐링' 방법이었다.

 

1909년 여름 끝자락, 샤갈은 여자친구였던 테아의 집을 방문했다. 거기에서 처음 벨라를 만났다. 막 20대가 된 샤갈은 녹색으로 꾸민 열네 살 소녀에게 홀딱 반했다. 크고 검은 눈과 진한 갈색 머리, 부드러운 얼굴은 꿈꾸던 이상형의 면모였다.

 

샤갈은 벨라와의 첫 순간을 이렇게 돌아봤다

“나는 그녀야말로 내 운명의 여인, 아내가 될 사람임을 알았다."

 

샤갈은 이날 이후 더는 테아를 그리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벨라 뿐이었다. 벨라도 샤갈이 싫지 않았다. 훗날 벨라는 샤갈에 대해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고 회고한다. 둘은 미래를 약속하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마르크 샤갈, 나와 마을
마르크 샤갈, 나와 마을

 

 

▨ 파리에서 마음껏 재능을 펼치다

 

1910년. 샤갈은 프랑스 파리로 유학길에 올랐다. 벨라를 두고 와 슬픔이 컸지만, 파리에 도착하자 "올 가치가 있었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특히 스승 박스트가 그렇게 가보라고 한 미술관들은 충격적이었다. 마네와 고흐, 마티스 등 개성이 넘치다 못해 철철 흐르는 화가들의 작품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뿐인가. 유명한 예술가는 여기에 다 있었다. 잡화점에서 페르낭 레제가 보였다. 술집에 들어가면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카페에선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등이 토론 중이었다.

 

샤갈에게 파리는 말 그대로 '미친 도시'였다. 샤갈은 파리와 사랑에 빠졌다. 파리를 두 번째 고향으로 품었다. 프랑스식 이름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은 이때 탄생했다. 그의 본명은 모이셰 하츠켈레프 세갈이다.

 

파리지앵(parisien)의 눈에 샤갈은 눈길 끄는 신인이었다. 러시아풍 특유의 진한 색채가 담긴 샤갈의 그림은 이국적이었다. 몽환적이며 환상적이었다. 말을 더듬고 언어가 서툴 뿐, 나름 유머도 있는 등 사람 자체도 괜찮았다.

 

샤갈은 아카데미 쥘리앙(Academie Julian) 등에 다녔다. 렘브란트 등 옛 17세기 화가들의 작품부터 막 태동하는 입체파와 야수파 화풍까지 폭넓게 익혔다.

 

샤갈이 파리에서 그린 '나와 마을'은 원과 삼각형, 사각형 등 기하학적 구성으로 짜여있다. 색은 동화책 삽화처럼 다채롭다. 이는 샤갈이 입체파와 야수파 기법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 중 탄생한 그림이다. 고향 비테프스크에 대한 아련함도 담긴 작품이다.

 

벌써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당연히 인기는 높아졌다. 피카소도 샤갈의 그림을 보고 "마티스가 죽으면 색이 무엇인지 아는 화가는 샤갈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샤갈은 1913년 9월 독일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샤갈을 초대한 독일 미술상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대성공이었다. 샤갈은 이후에도 몇 차례 전시를 성황리에 마쳤다. 샤갈은 기쁨이 커질수록 벨라에 대한 그리움도 짙어진다는 걸 느꼈다. 향수병이 생겼는지 고향 비테프스크도 점점 더 눈에 밟혔다.

 

그리움은 들불처럼 번져갔다. 아침마다 간 유대교 예배당, 냄새 나는 생선 궤짝과 볼품없는 채소밭, 투박한 가족, 뒷동산을 제집처럼 뛰어노는 동물들이 보고 싶었다. 샤갈은 짐을 쌌다.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학 생활 근 4년 만이었다.

 

 

마르크 샤갈, 생일
마르크 샤갈, 생일

 

 

▨ 전쟁 포화 속에서도 꽃 피운 사랑

 

1915년 7월25일, 샤갈은 벨라와 결혼했다. 허락받기까지 고생 좀 했다. 벨라의 집안은 부유했다. 벨라 아버지는 보석상이었다. 비테프스크 등에서 가게 세 곳을 운영했다. 벨라도 재원이었다. 공부도 잘했고, 배우를 꿈꿀 만큼 끼도 있었다.

 

벨라의 부모는 가난뱅이 출신 화가가 미덥지 않아 결혼에 반대했다. 하지만 샤갈과 벨라의 불붙은 사랑을 식히지 못했다. 벨라는 이미 샤갈에게 인생을 걸기로 다짐한 상태였다.

 

샤갈의 생일이자 결혼이 2주 반 남짓 남은 그해 7월7일, 벨라는 꽃다발을 들고 이 남자 품에 안겼다. 얼마 후 샤갈은 이 순간을 곱씹으며 '생일'을 그린다.

 

이 그림에서 사랑에 취해 두둥실 뜬 남성이 샤갈이다. 꽃을 든 채 그와 입 맞추는 여성은 벨라다. 검은 드레스의 흰색 옷깃은 순결을 상징한다. 붉은 바닥, 장난감 같은 장식물은 둘의 들뜸을 포근하게 감싸는 듯하다.

 

둘이 사랑을 속삭이는 사이, 세계는 포화 속으로 내달렸다. 1차 세계대전이었다. 온 나라가 뒤숭숭했다. 러시아 국경도 봉쇄됐다.

 

결혼 후 바로 프랑스로 가려고 한 샤갈과 벨라는 그대로 발이 묶였다. 그래도 신혼은 신혼이었다. 샤갈에겐 벨라만 있다면 어디든 천국이었다. 딸 이다를 낳았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샤갈은 곧 그의 대표작이 되는 '산책', '도시 위에서' 등을 작업한다. '산책'에선 그저 같이 걷는 것만으로 공중에 뜨는 듯한 설렘을 누린다는 걸 알렸다. '도시 위에서'를 통해선 서로 끌어안는 것만으로 하늘을 나는 듯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걸 표현했다.

 

맑은 초록색과 푸른색 옷이 회색 배경 위에서 희망을 꿈꾸게 한다. 바로 밑에는 고향 비테프스크의 풍경이 또 펼쳐져 있다. 울타리 옆에선 한 남성이 엉덩이를 드러낸 채 일을 보고 있다. 이렇듯 전쟁 통에서도 유머는 여전했다.

 

그런데 샤갈은 여러모로 삶에 서툴렀다. 샤갈의 관심은 벨라와 그림, 고향과 유대인 문화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벨라는 그런 샤갈의 아내이자 뮤즈, 어머니 역할도 했다. 벨라는 붓을 든 샤갈 옆에서 큰소리로 책을 읽어줬다. 보들레르의 시 등을 통해 영감을 안겨줬다. 매니저처럼 샤갈의 작업과 전시도 관리했다.

 

샤갈은 종종 전쟁이 끝나지 않을까봐 불안해했다. 그는 파리에 두고 온 작품들을 걱정했다. 모든 일정이 틀어졌다며 초조해하기도 했다. 그럴 때도 벨라가 그를 다독였다.

 

 

마르크 샤갈, 도시 위에서
마르크 샤갈, 도시 위에서

 

 

 

▨ 방랑 생활 시작, 핍박과 시련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터졌다. 샤갈은 내심 환호했다. 이들이 소수민족 차별 철폐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샤갈도 흐름을 탔다. 유대인 신분으로도 비테프스크 미술학교 교장직에 오를 수 있었다. 샤갈은 가슴이 벅찼다. 이대로만 가면 본보기 박스트만큼 잘될 것 같았다.

 

그러나 상황이 차츰 이상하게 흘러갔다. 1918년 샤갈이 예술인민위원으로 혁명 승리 1주년 축하 행사를 기획하던 중 문제가 터졌다.

 

혁명가들은 이 순수한 남자의 그림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들은 제멋대로 둥둥 날고 있는 동물 그림들을 보고 "그러니까, 당신이 그린 동물은 레닌과 무슨 상관이 있소? 공산주의를 위한 그림을 그릴 생각은 있는 거요?" 샤갈에게 따졌다.

 

샤갈도 처음에는 혁명가들과 타협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치를 위한 예술에 아예 몸을 던질 수는 없었다. 샤갈이 원하는 건 파리가 내뿜던 자유로운 예술 문화였다. 샤갈은 순식간에 혁명의 변절자로 지목받았다. 이제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1922년 5월, 샤갈은 가족들과 함께 다시 독일 베를린으로 왔다. 샤갈은 베를린에서 자서전 <나의 인생>을 썼다. 그때가 35세쯤이었다. 그는 "제국주의 러시아도, 소비에트 러시아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낯선 남자였다"라는 문장을 꾹꾹 눌러 담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쯤 주변인들의 죽음이 잇따랐다. 러시아에 남은 샤갈의 아버지는 트럭에 치여 숨졌다. 벨라의 처가가 털렸다. 손위 동서는 피살당했다.

 

샤갈에게 베를린도 안식처가 아니었다. 막 고개를 든 나치는 유대인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모든 파격적인 그림도 싫어했다. 샤갈은 유대인이면서 특이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당연히 표적이었다.

 

샤갈은 재차 파리로 피신했다. 샤갈은 유랑했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기에 이념, 편견으로 중무장한 세상은 너무 위협적이었다.

 

1937년. 샤갈은 나치가 자신과 칸딘스키, 몬드리안 등 그림을 모아 뮌헨에서 '퇴폐 미술전'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치가 독일에 남은 샤갈의 그림 중 '찡그린 자화상' 등을 걸곤 "얼굴의 자조적 분위기가 유대인의 비뚤어진 정신을 표현한다"고 비난했다는 말도 듣게 됐다.

 

1940년은 그간 유럽 전역을 돌던 샤갈이 프랑스 시민권을 받은 후 한숨 돌리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프랑스 남부에 비시(Vichy) 정부가 들어섰다. 사실상 나치 독일 협력 정부였다. 이들은 유대인의 프랑스 시민권을 뺏고. 유대인을 공직, 학계에서 쫓는 반(反)유대인 법을 만들었다.

 

샤갈은 붙잡혔다가 겨우 풀려나자 더 먼 곳으로의 피신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샤갈은 이 와중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 말이 맞았다.

 

샤갈은 마티스의 색채를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찬란한 빛깔의 캔버스에 벨라와 비테프스크를 꾸준히 담았다.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 동물, 자연을 표현했다. 유대교 특유의 신화적 세계를 구현했다.

 

'하얀 십자가상' 등 성서와 학살을 접목한 비판적 작품도 망설이지 않았다. "너무 좋아요." 그림을 받아든 벨라가 이 말을 하면 샤갈은 신나게 자기 서명을 박아넣었다.

 

 

마르크 샤갈&#44; 바바의 초상화
마르크 샤갈, 바바의 초상화

 

 

▨ 뉴욕을 새 삶의 터전으로 삼다

 

히틀러는 샤갈을 '제거 대상' 화가로 콕 집었다. 1942년 샤갈 가족은 미국 뉴욕으로 탈출했다. 히틀러가 주시하는 이상, 그에게 유럽 전역이 위험했다.

 

샤갈은 뉴욕을 새 삶의 터전으로 봤다. 피난 온 다른 예술가들처럼 잠시 몸을 피하는 곳으로 여기지 않았다. 뉴욕의 활력을 체감했다. 어쩌면 이곳이 제2의 파리가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샤갈은 처음 파리에 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여러 모임에 참석했다. 이번에도 언어장벽을 느꼈으나 인기와 유명세, 특유의 유머로 상쇄했다. 샤갈은 오페라 공연장 천장화와 무대 장식 등 일을 맡았다.

 

그의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이젤 회화에서 벗어나 구현한 대형 3차원 회화는 꿈속 세계를 체험하게 했다. 그 무렵 뉴욕과 시카고 등에서 샤갈의 작품을 내건 전시회가 이어졌다. 이 또한 흥행했다.

 

이쯤 샤갈은 누가 봐도 성공한 화가였다. 하지만 샤갈의 세상에서 가장 큰 축이 무너졌다. 벨라가 죽었다. 샤갈은 정신을 못 차렸다. 완전히 붕괴됐다. 피신 와중에도 놓지 않던 붓을 내려놨다.

 

"평생토록 그녀는 내 그림이었다."

 

이대로 두면 슬픔에 잠긴 채 숨 막혀 죽을 것 같았는지, 딸 이다는 샤갈에게 30살 연하의 여인 버지니아 해거드 맥닐라를 소개했다. 벨라가 죽은 뒤 1년쯤 흐른 후였다. 샤갈과 버지니아의 관계는 깊어졌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버지니아가 떠나버리자 이다가 또 나섰다. 이번에는 러시아 출신의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애칭 바바)를 데려왔다. 샤갈과 같은 유대 신앙이었다. 취향도 꽤 비슷했다.

 

60대가 된 샤갈은 바바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바바와 여행을 다니며 생기를 되찾았다. 샤갈은 1948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1953~1956년께 바바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림 속 구부정한 자세로 팔레트를 든 채 오는 화가는 과거의 샤갈이다. 환한 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듯한 해사한 여인은 현재와 미래의 바바다. 옆에는 생명력을 가득 품은 꽃이 가득하다. 검붉은 배경은 칠흑 같던 어둠 후 찾아오는 아침 햇살을 떠올리게 한다.

 

 

마르크 샤갈&#44; 또 다른 빛을 향해
마르크 샤갈, 또 다른 빛을 향해

 

 

▨ 루브르에 샤갈의 작품이 걸리다

 

샤갈이 1950년 남프랑스에 정착할 때쯤, 그는 이미 20세기 미술의 거장이었다. 샤갈의 작품 세계는 그의 색채만큼 다채로워졌다.

 

벨라와 바바 등 사랑, 동물에 대한 애정, 고향 비테프스크의 향수와 함께 유대교를 주제로 한 그림을 자주 그렸다. 특히 1931년 예루살렘에서 '통곡의 벽'을 마주한 후로는 '토라를 들고 있는 랍비', '순교자' 등 걸작을 남겼다.

 

1951년 샤갈은 20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을 찾았고, 1957년에는 그의 삽화가 들어간 성경책이 출판돼 또 방문했다. 샤갈은 끊임없이 유대인과 유대교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다.

 

1962년 들어선 예루살렘 히브리 의과 대학의 회당을 장식하는 12개 스테인드글라스도 제작했다. 샤갈의 그림은 루브르 미술관에 걸렸다. 생존 예술가로 겪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다.

 

샤갈의 마지막 작품은 1985년작 '또 다른 빛을 향하여'다. 천사의 날개를 단 샤갈이 캔버스 앞에 앉아있다. 표정은 초연하다.

 

"…신이시여, 밤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날이 밝기 전에 제 눈을 감게 할 것이고, 그리고 저는 하늘과 땅 위에 당신을 위한 그림을 다시 한번 그릴 것입니다."

 

샤갈은 20여 년 전에 자신이 쓴 시를 이 그림에 붙였다고 한다. 샤갈은 이 작품을 완성한 직후 눈을 감았다. 98세 나이였다.

 

- 헤럴드경제 <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에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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