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한 신사(The Stout Gentleman)
-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우울한 11월,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여행 도중에 몸 상태가 약간 좋지 못하여 길을 멈추고 있었다. 거의 다 나아가고 있었지만, 아직 열이 좀 있는 것 같아서 ‘다비’라는 조그만 읍의 한 여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시골 여관의 비 오는 일요일! 하루 종일 갇혀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똑같은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내 처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비가 후드득 창문을 들이치고 있었다. 교회의 종소리가 서글프게 울려 왔다.
‘눈요기할 만한 것이 없을까’ 하고 창가에 다가갔지만, 주변에 위안이 될 만한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침실 창밖에는 기와지붕과 굴뚝이 가까이에 있고, 거실 창으론 마구간 앞의 공터가 훤히 보였다.
비 오는 날의 마구간 앞마당처럼 지긋지긋한 곳이 또 있을까. 그곳에는 나그네와 마부들이 흩어 놓은 젖은 지푸라기들이 너저분했다. 한쪽 구석에는 가축의 똥이 섬처럼 쌓여있고, 그 주변엔 샛노랗게 물이 고여 있었다.
짐수레 밑에는 흠뻑 젖은 몇 마리의 닭이 있었는데, 그 속에 벼슬을 축 늘어뜨린 가련한 수탉이 한 마리 끼어 있었다. 마치 죽은 닭처럼 꽁지깃이 흠뻑 젖어 축 늘어진 채 하나로 달라붙어 있었고, 등에서 그 깃을 따라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짐수레 곁에는 꾸벅꾸벅 조는 듯한 젖소가 우물우물 되새김질을 하면서 끈기있게 비를 맞고 서 있는데, 등에선 무럭무럭 김이 나고 있었다.
허옇게 흐린 눈을 한 말은 쓸쓸한 마구간에 진력이 났는지 귀신처럼 긴 목을 창밖으로 내놓고 있었고 추녀에서 목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 개집이 있고 거기에 묶인 가련한 똥개가 이따금 짖는 것도 아니고 낑낑 우는 것도 아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식모는 파텐(나막신)을 신은 발로 무겁게, 마치 오늘의 날씨처럼 찌푸린 얼굴을 하고 마구간 앞마당을 왔다갔다 했다. 이렇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두가 무미건조하고 쓸쓸했다. 다만, 오리 떼만이 아랑곳하지 않고 다정한 술친구처럼 웅덩이 둘레에 모여서 그 물을 둘러싸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외톨이가 된 나는 맥이 풀려 뭐든지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었으면 하였다. 도저히 방에선 견딜 수 없게 되자, 그곳을 빠져나와 ‘장돌뱅이 방’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는 방을 찾아갔다.
그곳은 흔히 어느 여인숙에서나 장돌뱅이라든지 세일즈맨 같은 여행자 즉, 이륜마차나 말이나 합승마차를 타고 줄곧 온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는 돈벌이의 무사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특별히 마련한 공용 방이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그들은 오늘날 옛날 무사들의 유일한 후계자이다. 창을 채찍으로 바꾸고, 방패를 상품 견본표로 바꾸고, 갑옷을 외투로 바꾸었을 뿐, 그들은 옛날과 똑같이 모험투성이의 유랑 생활을 보낸다.
어느 누구도 견주지 못할 미녀를 수호하는 대신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어느 부자나 제조업자의 명성을 드날리고, 그들을 대신해서 언제나 기꺼이 거래를 한다. 지금은 싸움이 아니라 거래가 시대의 유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옛날같이 싸움이 일상적이었던 시대라면 여인숙의 방은 밤이 되면 갑옷이나 청룡도나 얼굴만을 내놓은 투구 등 여행에 지친 무사들의 갑주류가 주위에 즐비하게 걸려 있었겠지만, 이 장돌뱅이 방은 두터운 나사 외투, 여러 가지의 채찍과 박차, 각반, 기름 헝겊으로 싼 모자 등등 무사 수행자의 후계자들 차림새로 장식되어 있었다.
난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아무나 말 상대가 되어 줄 만한 훌륭한 인물을 만나 보았으면 했는데,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방에는 두세 사람이 있긴 했지만 별 볼 일 없었다.
한 사람은 마침 아침식사를 끝내려던 참이라 버터와 빵을 정신없이 먹으면서 급사를 나무라고 있었고, 한 사람은 각반의 단추를 채우면서 구두를 잘 닦지 않았다고 여인숙의 구두닦이에게 마구 욕을 하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앉아서 손가락으로 식탁을 마냥 두들기면서 유리창에 흐르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모두들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은 채 연이어 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맥없이 창가로 가서 모두가 아랫도리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우산에서 물방울을 튀기며 정신없이 교회로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교회의 종소리가 그치자 거리는 다시 조용했다.
나는 곧 맞은편 상점의 딸들을 보면서 눈요기를 할 수 있었다. 그 집 딸들은 나들이옷이 젖을까 봐 집을 나가지 않고 여인숙에 숙박하는 손님들의 마음을 끌려고 앞의 창에 아름다운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감시가 심한 어머니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딸들을 불러들였다. 또다시 나는 바깥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기나긴 낮을 뭘 하며 지낼까’ 생각하니 몹시 속상하고 쓸쓸했다.
거기에다 여인숙에서 보이는 것으로 말하자면 모두가 다 지루한 하루를 10배도 더 지루하게 만드는 것들뿐이었다. 맥주와 연기 냄새가 풍기는 담배, 벌써 대여섯 번 되풀이해 읽은 오랜 신문, 비보다도 더 못 견딜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책들......
나는 옛날 잡지 <부인의 벗>을 손에 들고 속이 상해 죽을 지경이었다. 스미스 가, 브라운 가, 잭슨 가, 존슨 가 등등 조금도 변하지 않는 틀에 박힌 가문의 이름이며 그 후손들의 이름, 여인숙 창문에 낙서된 진부한 시 구절이나 읽어야 했다.
그날은 우울하고 험악한 대로 지나갔다. 군데군데 찢긴 구름들이 느릿느릿 흘러 갔다. 내리는 비조차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단조롭고 지루하게 주룩주룩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정오가 지날 무렵, 경적을 울리고 역마차가 큰 거리로 달려오는 것을 보았을 땐 정말 가슴이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명 우산을 쓰고 차 밖으로 나온 승객들은 옷이 쭈글쭈글 구겨져 있었고, 비해 젖은 두터운 나사외투나 반외투에서는 김이 오르고 있었다.
그 경적소리를 듣고 근방을 기웃거리던 아이들 떼거리, 똥개들, 빨간 머리의 마부, 구두닦이, 그밖에 여인숙 일대에서 뜯어먹고 사는 부랑자들이 그들의 은둔지에서 우루루 몰려 나왔다. 그러나 이 소동도 잠시뿐이었다. 역마차는 다시 급히 가 버리고 소년도, 걔도, 마부도, 구두닦이도 모두 본래 소굴로 슬슬 되돌아갔다.
또다시 조용해진 거리.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날씨는 도무지 개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청우계(기상 관측에 쓰는 기압계)는 우천을 가리켰다. 여인숙 안주인이 기르고 있는 고양이는 불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얼굴을 비비고 그 손으로 귀를 긁고 있었다. 달력에는 끔찍한 예보가 위에서 아래까지 한 달 동안 계속이었다.
‘이즈음 비 많음.’
난 기가 막혔다. 도무지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었다. 똑딱거리는 기둥시계의 시침 소리조차 권태로웠다. 그러나 급기야 벨소리가 울리면서 이 여인숙의 정적은 깨졌다. 이어 여인숙 주방에서 급사의 소리가 들렸다.
“13호실의 뚱뚱한 분이 아침을 드십니다. 차, 버터와 빵, 햄과 계란이요. 계란은 너무 삶지 않도록 하세요.”
나는 자유로운 상태에서는 어떤 일이라도 중대해진다. 드디어 머리를 써서 생각할 거리가 생겼고, 생각나는 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를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이 경우 마음속에서 그릴 만한 재료를 얻은 셈이었다.
위층의 손님이 스미스 씨라든가 브라운 씨, 잭슨 씨, 존슨 씨 혹은 단지 13호실이라고만 불렸다면 전혀 상상의 실마리를 잡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선 아무것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뚱뚱한 분이라는 이 호칭으로 인해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곧 체격이 짐작되었다. 그 인물이 내 마음에 뚜렷하게 보이면서 그 뒤로는 상상할 거리가 풍성했다.
그 사나이는 뚱뚱하다고 했지만, 다른 표현으로는 육중하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아마도 상당히 나이가 들었는지 모른다. 나이가 들어서 점점 살이 찌는 사람이 많으니까. 느지막이 아침을, 더구나 자기 방에서 먹는 것으로 보아, 하고픈 대로 살고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신분을 것 같았다. 틀림없이 뚱뚱하고 얼굴이 붉고 육중한 노인일 것이다.
벨이 또 요란하게 울렸다. 뚱뚱하게 생긴 신사가 아침밥을 재촉하는 모양이었다. 상당한 신분의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 세상에서 어떤 억압도 받지 않는 신분일 것이다. 그의 치다꺼리는 언제나 그 누군가가 바로바로 해결해 주었으리라. 식욕이 왕성한 공복이면 다소 기분이 언짢아지겠군. ‘어쩌면 런던의 시 참사회원일지도 모르고, 혹은 하원의원일지도 모르지.’ 하고 생각하였다.
아침 식사를 위로 가져가고 잠시 조용해졌다. 신사는 차를 마시는가 보다. 또 요란스레 벨이 울렸다. 그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다시 벨 소리가 요란했다.
‘웬일일까! 굉장히 악쓰는 노인이가 보군!’
급사가 잔뜩 성이 나서 내려왔다. 버터에서 썩은 냄새가 난다, 계란을 너무 익혔다, 햄이 짜다는 등 뚱뚱한 신사는 확실히 음식에 대해 까다로운 사람인 것 같았다. 먹고는 고래고래 소리치고 급사를 못살게 심부름시키고는 집안사람들과는 으르렁거리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안주인이 잔뜩 화가 났다. 그녀는 팔팔한 성격의 여자라고나 할까. 잔소리가 좀 심하고, 채신머리가 없어 보이기는 하나 그래도 제법 예쁜 편이다. 잔소리가 심한 여자들이 흔히 그렇듯 남편은 좀 모자란 편이다. 그녀는 그 좋지 못한 아침 식사를 2층으로 보냈다고 고용인들을 몹시 나무랐지만 뚱뚱한 신사에 대해선 아무런 군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런 점으로 봐서 그 신사는 틀림없이 상당한 신분의 사람으로서 시골 여인숙에서 떠들썩하게 폐를 끼쳐도 그다지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새로 계란과 햄, 버터와 빵을 위로 가져갔다. 이번에는 그런대로 기분 좋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 이상 잔소리가 없었다.
내가 장돌뱅이 방을 채 몇 번밖에 오가지 않은 사이에 또 벨이 울렸다. 그러자 곧 급사가 집안을 샅샅이 뒤지느라 부산스러워졌다. 뚱뚱한 신사께서 <타임즈>나 <크로니클> 신문을 읽겠다는 분부였다.
‘그렇다면 휘그당이군.’ 하고 나는 단정했다. 그게 아니라면 핑계만 있으면 제멋대로 행패를 부리는 것으로 보아 혹시 '급진파'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급진파 작가 헌트는 체구가 크다더니 ‘바로 그 헌트 본인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나는 호기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그토록 떠들어대는 그 뚱뚱한 신사란 도대체 누구냐고 급사에게 물었으나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것 같았다. 분주한 여인숙 주인은 잠깐 머물다 가는 손님의 이름이나 직업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기 마련이다.
옷의 색깔과 몸차림만으로도 나그네의 이름 따윈 충분히 짓고도 남았다. 키 큰 신사라거나, 혹은 키 작은 신사, 검은 옷을 입은 신사, 갈색 옷을 입은 신사, 아니면 지금처럼 뚱뚱한 신사라고 부르면 그만이다. 일단 이런 이름을 붙이고 나면 대부분의 경우 그대로 쓰게 되면서 아무것도 물어볼 필요가 없게 된다.
비! 비! 비! 인정사정없는, 그칠 줄 모르는 비!
집 밖으로는 발 내디딜 엄두도 안 나는 데다가 집안 역시 아무 위안 거리가 없었다. 이윽고 머리 위해서 누구가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뚱뚱하게 살찐 신사의 방이었다. 그 발자국 소리의 육중함으로 보아 분명 몸집이 큰 사람이었다. 그리고 삐걱대는 구두창을 댄 것을 보니 늙은이일 것 같았다.
난 추측했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규칙적인 습관을 가진 구식 부자 노인이며, 지금 식사 후 운동을 하고 있는거야.’
나는 이번에는 난로 위의 선반 둘레에 붙어있는 합승마차, 여관 따위의 광고를 모조리 읽었다. <부인의 벗>은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나는 방을 나와서 다시 내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이웃 침실에서 폭풍이 일어났다. 문이 열리더니 다시 쾅 닫혔다. 혈색이 좋고 명랑한 얼굴이어서 시선을 끌던 여급이 몹시 낭패한 얼굴로 아래로 내려갔다. 왠지 모르겠으나 뚱뚱한 신사가 폭언을 한 모양이었다.
이로써 지금까지 내가 했던 대강의 짐작은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이 미지의 인물은 어쩌면 노신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노신사란 여급에게 난폭하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 법이다.
그렇다고 젊은 신사도 아닌 것 같았다. 젊은 신사라면 상대방을 그렇게까지 화나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중년배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반드시 추남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급도 상대의 이야기에 저토록 심하게 성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그 이유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여인숙 안주인의 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녀가 퉁탕퉁탕 2층으로 올라오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벌게진 얼굴로 모자를 흔들면서 연방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 지붕 밑에선 절대 그런 짓은 못하게 해야지. 설령 손님이 아무리 돈을 잘 뿌려도 이 집에선 어림도 없지. 우리 집에서 일하는 여급을 그렇게 취급하는 건 싫다구. 이런 건 아주 질색이야.”
나는 본시 싸움은 싫어했고 특히 여자, 그 중에서도 미녀가 상대라면 더욱 어쩔 줄 모르는 터라, 몰래 내 방으로 돌아와서 오늘 반쯤 닫아버렸다. 그러나 호기심 때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안주인은 조금도 굽히는 기색 없이 적의 보루로 뛰어 들어갔다. 들어가자 문을 쾅 닫았다. 한동안 세차게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차츰 그 소리는 다락방의 돌풍처럼 누그러졌다. 이어 웃음소리가 들리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안주인은 약간 비뚤어진 모자를 바로 하면서 그 얼굴에 이상한 웃음을 띠고 방에서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바깥주인이 어찌된 영문인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애가 바보예요.”
안주인의 대답이었다. 나는 성질 좋은 여급을 그토록 성나게 하고 잔소리가 심한 안주인을 싱글벙글 하게 하는 불가해한 인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점점 더 알 수가 없었다. 이 사나이는 필연 늙은이도, 심술쟁이도 아닐 것 같았다. 나는 이 사나이의 얼굴을 다시 한번 고쳐서 아주 다르게 그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나이를 시골 여인숙 대문에서 흔히 보는, 배를 불쑥 내민 뚱뚱한 신사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얼룩 염색을 한 목도리를 두르고 맥주로 인해 얼굴이 다소 불그레하고 진득진득한 인상의 사람. 세상의 안팎을 두루 구경하여 술집 분위기에도 익숙해서 좀체 급사에게도 속지 않고 악랄한 술집 주인의 술법을 잘하는 ‘하이게이트의 맹세’를 한 그러한 사나이, 다소 식도락을 즐기는 편으로 1기니 정도의 돈쯤은 뿌리기도 하고, 어느 급사라도 불러내어 여급을 마음대로 다루며 카운터 옆에서 마담과 쑥덕거리기도 하고 식후에 마시는 1파운드의 붉은 포도주나 니가스주 한 잔으로 말이 많아지는 그러한 사람일 것이다.
이러한 추측을 하고 있는 동안에 오전은 지나가 버렸다. 어떤 하나의 확신을 종합하기가 바쁘게 무언지 까닭 모를 그 무엇이 나타나 그것을 뭉개 버려, 나는 또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분간을 못하고 있었다.
열이 오른 머리로 혼자서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그만 그렇게 돼버리고 말았다. 아직 얼굴조차 보지도 못한 인물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생각하다 보니 나는 점점 이상해졌다.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초조에서 우러나온 발작이었다.
식사 때가 되었다. 뚱뚱한 신사가 ‘장돌뱅이 방에서 식사를 한다면 그제야 그 모습을 볼 수 있겠지’ 하고 기대했지만, 신사는 자기 방으로 식사를 가져오게 했다.
그렇게 혼자만 있고 싶어하며 불가해한 태도를 취하는 까닭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건 아무래도 급진파일 리는 없다. 세상 사람들과 이렇게 사귀기 싫어하고 비 오는 날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혼자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귀족적이다.
더구나 불만을 품은 정치가로서는 사치스러운 생활이다. 갖가지 음식에 대해서 이러니저러니 까다롭게 굴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찬미하는 사람처럼 술잔만 기울인다.
그러나 내가 품고 있던 의혹은 곧 풀렸다. 최초의 한 병을 아직 비우지 않았으려니 하고 생각할 때, 한가락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신이여, 우리 국왕을 보호하소서’ 하는 영국 국가였다.
그렇다면 급진파가 아니라 충성스러운 시민임이 분명하다. 술잔을 기울이면 충성심이 우러나고 달리 고수할 것이 없는 경우라도 기꺼이 왕과 헌법만을 고수할 인간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나는 엉뚱한 억측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암행하는 귀한 사람이 아닐까? 천만에, 그럴 리가!’
‘혹시 왕실 사람인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 사람은 뚱뚱하다니까.’
날씨 여전했다. 이상한 미지의 인물은 방에 틀어박힌 채 의자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가고 장돌뱅이 방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방금 도착한 사람들 중에는 두터운 나사 외투의 단추를 풀지 않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또 여기저기 도시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식사를 하고, 어떤 사람은 차를 마셨다.
내가 만일 오늘, 지금 같은 기분이 아니었더라면 이들을 자세히 관찰했을지도 모른다. 여행자 중엔 진짜 장난꾸러기가 둘이 있어서 나그네 특유의 농담을 마구 지껄이고 있었다. 루리자라든지, 예세린다라든지, 여러 귀여운 이름을 불러대면서 여급에게 암시를 하다가는 자기 농담에 자기가 히죽거렸다.
그러나 나의 머리는 뚱뚱한 신사 일로 가득하였다. 기나긴 하루 내내 이 신사를 대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니 이젠 그 짓을 그만둘 수도 없게 되었다. 차츰 밤이 깊어갔다. 나그네들은 신문을 두세 번 거듭 읽었다. 불 주변에 모여서 말 이야기나 경험담과 실패담을 계속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두 장난꾸러기는 예쁜 여급 이야기, 친절한 여관집 안주인 이야기까지 도맡아서 숱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들의 소위 나이트 캡(Night-cap, 잠들기 전에 마시는 술), 말하자면 물과 설탕을 섞은 브랜디라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종류 외의 혼합주 등 독한 술잔을 조용히 비우는 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이 끝나자 그들은 차례로 벨을 울려서 구두닦이나 여급을 불러댄 뒤 불편해진 헌 신발을 개조한 슬리퍼를 끌면서 잠자리로 돌아갔다.
나중에는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그 사람은 다리가 짧고 허리가 긴 다혈증의 사나이로 엷은 갈색 머리에 머리통이 컸다. 그는 붉은 포도주가 든 니가스 컵에 스푼을 꽂은 채 그 컵을 손에 들고 혼자 앉아 있었다.
그는 한 모금 마시고는 젓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한 모금 마셔서 마침내 한 스푼밖에 남지 않았다. 빈 컵을 앞에 둔 채 이 사나이는 의자에 몸을 곧바로 기대더니 곧 잠이 들고 말았다.
이윽고 촛불도 졸음이 온 것 같았다. 길어진 촛불 심지는 검어지고 끝이 돌돌 말려 방 안에 그나마 남아있던 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렇게 퍼진 어둠이 모든 것을 휩쓸어 갔다.
이미 방을 나가 벌써 잠이 들었을 나그네들의 두터운 나사 외투가 귀신같이 후줄근히 방의 사방 벽에 걸려 있었다. 다만, 시간을 알리는 기둥시계 소리와 잠든 술꾼들의 코 고는 소리, 집 추녀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한밤중이 되자 몇몇 교회의 종소리가 엇갈려 들려왔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뚱뚱한 신사가 왔다갔다 하였다.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신경과민인 사람에겐 유달리 그러했다.
오싹한 느낌이 들게 하는 외투, 목구멍에서는 골골하는 것 같은 잠결 소리, 거기다 이 이상한 인물이 삐걱거리며 내는 발자국 소리, 그 발자국 소리는 차츰 작아지다가 마침내 없어졌다.
나는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극도로 흥분해서 이야기의 주인공 같이 저돌적인 기분이었다. ‘어떤 녀석인지 이 사내를 한번 보리라’ 하고 나는 중얼댔다.
방의 불빛을 더듬어 13호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비어 있었다. 테이블 앞 커다란 좌석엔 넓은 안락의자가 놓여있고, 테이블 위에는 비어있는 큰 컵과 <타임즈> 신문이 놓여 있었다. 방에서는 스틸튼 치즈의 냄새가 풍겼다.
이상한 미지의 인물은 방금 잠자리로 물러간 모양이었다. 나는 몹시 실망해서 내 방으로 돌아오는 복도를 걷다가 침실 입구에 밀랍을 먹인 더럽고 커다란 가죽장화가 맨 위쪽에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그 미지의 사람의 장화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굴 속으로 들어간 무서운 인물을 시끄럽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 머리에다 권총이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것으로 쏘아댈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잠자리에 들어가서도, 또 꿈속에서도 뚱뚱한 신사와 위쪽에 놓여져 있는 가족장화에 쫓기었다.
이튿날 아침, 약간 늦잠을 자다 떠들썩한 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그러나 더 뚜렷이 잠을 깨자, 문밖에서 역마차가 출발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아래층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께서 우산을 잊으셨대! 13호실에서 손님 우산을 찾아와!”
이어 복도에서 여급이 급히 뛰어가는 소리가 나고 뛰면서 큰소리로 대답하는 것이 들렸다.
“있어요! 우산이 있어요!”
그렇다면 그 이상한 인물이 막 출발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그 사나이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유일한 기회였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뛰어가 커튼을 젖히고 역마차 안으로 막 들어가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을 얼핏 보았다. 갈색 코트의 뒷자락이 둘로 갈라져 있고, 갈색 바지의 커다란 엉덩이가 완전히 보였다. 문이 닫히자 ‘이랴’ 하는 소리가 들리고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뚱뚱한 신사에 관해서 내가 본 것은 다만 그뿐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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