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명시 감상]
꿈, 그리움, 사랑과 낭만, 기쁨과 슬픔을 환상적인 색채로 표현하여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마르크 샤갈은 <나와 마을(I and the Village, 1911년)>이라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화가입니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로 시작되는 김춘수 시인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1969년)>은 '무의미의 시(절대시)'를 추구한 그의 1960년대 작품 경향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무의미 시’는 관념과 의미를 철저히 배제한 객관적인 어조로 사물의 순수한 이미지 표현에만 몰두하는 시를 말합니다.
그런데 마르크 샤갈의 그림 중에 '눈 내리는 마을'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김춘수 시인의 이 시 때문에 샤갈이 눈 내리는 마을 풍경을 그렸을 것이라고 지레 믿어버립니다.
그만큼 이 시의 이미지는 강렬합니다. 논리로 읽는 시가 아니라 이미지로 읽는 시죠.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각인 효과가 뛰어난 시입니다. '샤갈'이라는 이국적인 이름과 눈 내리는 풍경, 그리고 지붕과 굴뚝이 보이는 정겨운 마을이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시는 논리가 아닙니다. 논리는 학문의 영역에 있고, 시는 상상력과 예술의 영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만으로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입니다.
시를 읽다 보면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은 도대체 어떤 불일까 많이 궁금해집니다. 3월이 오면 눈이 남아 있는 산골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정겨운 마을에서 하룻밤 머물고 싶습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와 허연 시인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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