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소설 <강릉 가는 옛길>
한 교사의 가혹하고 부당한 차별로 인해
고통받은 어린 영혼의 상처와 갈등,
이에 맞서는 용기와 의지를 담은 이야기
❒ <강릉 가는 옛길> 줄거리
이야기는 주인공 ‘수호’가 초등학교 동창인 ‘경주’의 전화를 받는 것에서 시작된다.
경주는 초등학교 때 담임이었던 ‘이관모 선생님’의 죽음을 알려온다. 그러나 수호는 선생님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죽음이 모든 걸 거두어 가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과 함께, 그에 대한 미움이 앞선다. 그리고 그는 선생의 부음에 마지못해 대관령을 넘으며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수호, 은호 형제와 경주, 석주 형제 그리고 이관모 선생 사이에 있었던 옛 사연이 소설의 기둥 줄거리이다.
시골 학교에 부임한 첫 날 “이 반에서 누구네 집이 제일 부자냐?”는 질문부터 던졌던 이관모 선생과, 도시락 대신 장작 한 개비를 들고 가 구호물자인 옥수수죽을 먹어야했던 이 형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삐걱거리게 된다.
4학년 은호네 반 담임인 이관모 선생은 집안이 가난한 은호를 무시하고 석주가 부반장이 되게 만들더니 숙제 검사를 시키거나 떠드는 사람을 적어 내라는 등 실질적인 반장 노릇을 시켰다. 이관모 선생의 자전거는 퇴근할 때마다 짐 안장에 자루나 보로바꾸(종이상자)가 얹혀 있었다. 석주 어머니나 석주네 머슴이 자주 학교에 오가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은 “뭘 또 가지고 오는 모양”이라며 수군대며 그를 '관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수호는 4학년 때 군내 종합실기대회에서 동시로 금상을 받았던 터라 5학년 때도 망설임 없이 글짓기반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관모 선생이 글짓기반을 맡는 바람에 수호는 아이들 앞에서 무시와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이관모 선생은 수호가 쓴 작품은 대놓고 면박을 주었고, 누가 봐도 아닌 석주의 작품은 칭찬을 하였다. 이러한 차별은 군내 종합실기대회에 나갈 대표를 선발하는 교내 실기대회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수호를 제외시키고 자신이 고쳐 준 걸 그대로 써낸 명선이와 석주를 1등, 2등으로 뽑아 대회에 나가게 했다.
수호와 은호를 비롯해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학교에 도시락을 싸갈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미국이 보낸 구호양곡으로 관사 뒤뜰에서 옥수수죽을 끓여 주었다. 그런데 죽을 끓여 먹으려면 땔감이 필요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단체 급식을 하는 아이들에게 장작을 하나씩 가져오게 하여 선생님이 검사한 뒤 먹게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배가 고파도 관사 뒤뜰로 나가는 걸 꺼려했다. ‘장작 부대'니 '양거지'니 놀림 받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은호가 장작을 가져가지 않으려 하자 수호는 동생이 굶을 걸 걱정하여 자신의 장작을 반으로 쪼개어 동생에게 준다. 그런데 이걸 석주가 이관모 선생에게 일러바친다. 그는 수호와 은호를 불러내 아이들 앞에서 ‘나라 망신을 시키는 개돼지만도 못한 사람’, '나중에 커서 나라도 속일 사람' 이라며 야단치고 단단히 버릇을 고치겠다며 서로의 뺨을 때리라고 시켰다.
수호는 끝까지 은호의 뺨을 때리지 않았으나, 은호는 이관모 선생의 으름장에 눈물을 흘리며 수호의 뺨을 때렸다. 이관모 선생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수호의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래도 수호는 온몸에 힘을 주어 그의 손 힘에 밀려나지 않도록 맞섰다. 결국 그는 지쳐 그만두고 가 버렸다.
"내가 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그런 말을 대놓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우리 아버지 같은 어른이 아니라, 니 같은 선생님도 혼낼 수 있는 어른이라면, 하는 생각에 굳게 어금니를 물며 이 다음 나는 어른이 되어도 저런 말대가리 같은 어른은 되지 말자고, 당장은 아이들 앞에 우세를 떨고 창피를 당하면서도 마음속으로 한없이 그렇게 다짐했다." (90쪽)
"산수 시험 같은 건 형석이하고 나하고만 거의 백 점 받고, 석주새끼는 시험 볼 때마다 네 개 틀릴 때도 있고 다섯 개 틀릴 때도 있었는데 어떻게 2등이 세 명 나왔는지 모리겠다. 집으로 올 때 형석이도 어떤 때는 내가 지보다도 더 잘 본 시험도 있다 그랬고." (116쪽)
4학년 종업식이 다가올 무렵 은호는 수호에게 시험을 볼 때 늘 자신이 석주보다 더 많이 맞았던 것 같은데 우등상을 못 받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우연히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학교를 찾아가게 되고 결국 종업식 날 은호가 우등상을 받게 된다.
그런데 6학년이 되자 수호는 이관모 선생이 담임이 되면서 더욱 난처해진다. 이관모 선생은 전교 어린이 회장 입후보자를 뽑는 일에 개입했다. 지금까지 계속 반장을 했던 형래와 경주의 추천을 받은 수종이를 억지로 회장 후보에 앉혔고, 다음 날에 형래와 수종이는 회장 선거를 해야 하니 경주가 반장을 하라고 해서 아이들은 6년 만에 처음으로 형래가 아닌 경주를 반장으로 뽑았다.
반장이 된 경주는 회장 선거에서 형래를 돕고 나섰고, 이관모 선생에 의해 수호는 수종이의 선거 운동을 돕게 되었다. 경주는 “수종이 엄마가 미쳤다”며 수호와 수종이에게 야비한 방법으로 괴롭혔고, 이에 수종이는 울면서 교실을 나갔다. 이관모 선생과 경주 때문에 수종이는 학교를 그만두고 마을을 떠나버렸다.
수호의 회상은 여기까지다. 옛날 친구들 얼굴이나 보러 가자는 형래의 권유로 수호는 형래의 차를 타고 강릉으로 향한다. 차 안에서 수호는 작가가 된 자신과 검사가 된 동생 은호에게 김유선 선생님이 참스승이었듯 경주와 석주에게는 이관모 선생이 잊을 수 없는 스승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향으로 가는 대관령을 넘으면 이관모 선생의 영정 앞에 조금은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을 수 있을 것 같고, 경주의 손도 먼저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을 마주하게 된다.
작품 해설
“미국에서 보내온 구호양곡으로 옥수수죽을 먹고 자란 한 소년이 이제 또 한 소년의 아버지가 되어 그 시절을 돌아보는 길이다. 어디 슬픔뿐이랴. 슬프게 자란 형제들의 아름다운 우애도 있었으며, 어른들의 폭력에 맞서는 당당함도 그 어린 시절에 배웠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50~1960년대로, 6·25 전쟁으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았다. 특히 작품의 배경이 되는 강릉의 시골마을은 형편이 더욱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점심도시락을 싸갈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미국이 원조해준 구호양곡으로 끓인 옥수수죽을 먹는 모습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순원의 <강릉 가는 옛길>은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같이 초등학교 교실을 배경으로 권력 관계를 문제 상황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와 아이라는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교사와 아이라는 수직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선생님과 아이들, 그로 인한 아이들과 아이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가장 공정해야 하지만 오히려 약자에게 가혹하게 대했던 한 선생의 모습을 통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작가 이순원
1958년 강원도 강릉 출생. 강원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신용보증기금에서 근무하고 있다. 1988년 『문학사상』에 「낮달」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초기 작품들이 현실에 대한 비판의 발언이 강했다면, 그 이후의 작품들은 구체적 삶의 체험과 내면세계가 밀도 있게 반영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수색 그 물빛 무늬』, 『그대 정동진에 가면』, 『19세』, 『첫사랑』, 『첫눈』, 『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효석문학상, 동리문학상, 황순원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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