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에 관한 시 모음
<차례>
- 호박넝쿨이 가는 길 _전원범
- 호박 _ 함민복
- 호박등 _ 권대웅
- 애호박 _ 김정원
- 늙은 호박 _ 민현숙
호박넝쿨이 가는 길
- 전원범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호박넝쿨 앞에 대나무로
다리를 놓아 줍니다.
호박넝쿨도 말이 없지만
할머니의 뜻을 알고
그리로 기어갑니다.
할머니가 놓아 준 길
호박넝쿨이 가는 길
호박
- 함민복
호박 한 덩이
머리맡에 두고 바라다보면
방은 추워도 마음은 따뜻했네
최선을 다해 딴딴해진 호박
속 가득 차 있을 씨앗
가족사진 한 장 찍어 본 적 없어
호박네 마을 벌소리 붕붕
후드득 빗소리 들려
품으로 호박을 꼬옥 안아 본 밤
호박은 방안 가득 넝쿨을 뻗고
코끼리 귀만한 잎사귀 꺼끌꺼끌
호박 한 덩이 속에 든 호박들
그새 한 마을 이루더니
봄이라고 호박이 썩네
흰곰팡이 피우며
최선을 다해 물컹물컹 썩어 들어가네
비도 내려 흙내 그리워 못 견디겠다고
썩는 내로 먼저 문을 열고 걸어나가네
자, 出世다
호박등
- 권대웅
밥을 먹다가
문득문득 목이 메일 때가 있다
마음의 골목 맨 끝에
우두커니 떠 오르는 집 때문이다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도
머리속 저 어딘가에
자꾸 불을 켜는 곳이 있다.
아직도 그 집을 떠나지 않는
슬픔 때문이다
꺼질듯 꺼질듯,
식구들을 비추기에도 힘들더니만
미련이 남아서일까
후드득,
찬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면
가슴속에 남아 깜박거리는
저 등불 때문에 목젖이 아프다
애호박
- 김정원
담장을 넘어온 넝쿨에
벽시계 추같이 매달린 여린 호박을
보고 있을 때
옆집 할머니가 담벼락 위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나에게 말씀하신다
“어진아, 엄마한테
호박 따서 전 부쳐달라고 해.
그건 니꺼니까.”
여태 ‘그건’ 그냥
남의 호박에 지니지 않았는데,
할머니가 ‘니꺼니까’란
말을 덧붙이는 순간부터 내게 다가와
사랑스러운 호박, 애호박이 되었다
늙은 호박
- 민현숙
펑퍼짐한 엉덩이
땅바닥에 내려놓고
가을볕을 쬐는
늙은 호박
이름 부르기 좋아
늙은 호박이라지만
실은 씨앗 아기
잔뜩 품고 있는 새댁이다
이제나저제나
반으로 쩍 갈라져
품고 있던 씨앗 아기
와락 쏟아 내고 싶은
뚱뚱보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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