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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챙김의 글/시 한편의 여유

[호박에 관한 시] ‘호박넝쿨이 가는 길’ 외 4편

by 늘해나 2024.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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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에 관한 시 모음

 

<차례>

  • 호박넝쿨이 가는 길 _전원범
  • 호박 _ 함민복
  • 호박등 _ 권대웅
  • 애호박 _ 김정원
  • 늙은 호박 _ 민현숙

 

호박넝쿨이 가는 길

- 전원범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호박넝쿨 앞에 대나무로

다리를 놓아 줍니다.

 

호박넝쿨도 말이 없지만

할머니의 뜻을 알고

그리로 기어갑니다.

 

할머니가 놓아 준 길

호박넝쿨이 가는 길

 

 

호박과 넝쿨

 

 

 

호박

- 함민복

 

호박 한 덩이

머리맡에 두고 바라다보면

방은 추워도 마음은 따뜻했네

최선을 다해 딴딴해진 호박

속 가득 차 있을 씨앗

가족사진 한 장 찍어 본 적 없어

호박네 마을 벌소리 붕붕

후드득 빗소리 들려

품으로 호박을 꼬옥 안아 본 밤

호박은 방안 가득 넝쿨을 뻗고

코끼리 귀만한 잎사귀 꺼끌꺼끌

호박 한 덩이 속에 든 호박들

그새 한 마을 이루더니

 

봄이라고 호박이 썩네

흰곰팡이 피우며

최선을 다해 물컹물컹 썩어 들어가네

비도 내려 흙내 그리워 못 견디겠다고

썩는 내로 먼저 문을 열고 걸어나가네

자, 出世다

 

호박과 씨앗

 

 

 

호박등

- 권대웅

 

밥을 먹다가

문득문득 목이 메일 때가 있다

마음의 골목 맨 끝에

우두커니 떠 오르는 집 때문이다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도

머리속 저 어딘가에

자꾸 불을 켜는 곳이 있다.

아직도 그 집을 떠나지 않는

슬픔 때문이다

 

꺼질듯 꺼질듯,

식구들을 비추기에도 힘들더니만

 

미련이 남아서일까

후드득,

찬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면

가슴속에 남아 깜박거리는

저 등불 때문에 목젖이 아프다

 

 

초록 호박

 

 

 

애호박

- 김정원

 

담장을 넘어온 넝쿨에

벽시계 추같이 매달린 여린 호박을

보고 있을 때

 

옆집 할머니가 담벼락 위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나에게 말씀하신다

 

“어진아, 엄마한테

호박 따서 전 부쳐달라고 해.

그건 니꺼니까.”

 

여태 ‘그건’ 그냥

남의 호박에 지니지 않았는데,

할머니가 ‘니꺼니까’란

말을 덧붙이는 순간부터 내게 다가와

사랑스러운 호박, 애호박이 되었다

 

 

 

 

 

늙은 호박

- 민현숙

 

펑퍼짐한 엉덩이

땅바닥에 내려놓고

가을볕을 쬐는

늙은 호박

 

이름 부르기 좋아

늙은 호박이라지만

실은 씨앗 아기

잔뜩 품고 있는 새댁이다

 

이제나저제나

반으로 쩍 갈라져

품고 있던 씨앗 아기

와락 쏟아 내고 싶은

뚱뚱보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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