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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에세이 <보통 사람> 전문

by 늘해나 2024.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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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

 

- 박완서

 

남보다 아이를 많이 낳아 늘 집안이 시끌시끌하고 유쾌한 사건과 잔 근심이 그칠 날이 없었다. 늘 그렇게 살 줄만 알았더니 하나 둘 짝을 찾아 떠나기 시작하고부터 불과 몇 년 사이에 식구가 허룩하게 줄고 슬하가 적막하게 되었다.

 

자식이 제때제때 짝을 만나 부모 곁을 떠나는 것도 큰 복이라고 위로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식구가 드는 건 몰라도 나는 건 안다고, 문득문득 허전하고 저녁 밥상머리에서 꼭 누가 더 들어올 사람이 있는 것처럼 멍하니 기다리기도 한다.

 

딸애들이 한창 혼기에 있을 땐 어떤 사위를 얻고 싶으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고, 친구들끼리 모여도 화제는 주로 시집보낼 걱정이었다.

 

큰 욕심은 처음부터 안 부렸다. 보통 사람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이 쉬워 보통사람이지 보통사람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대라면 그때부터 차츰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우선 생활정도는 우리 정도로 잡았다. 왜냐하면 우리보다 잘 사는 사람도 많고 못사는 사람도 많은데 내 어림짐작으로는 우리보다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수효가 비등비등한 것 같으니 우리가 중간 즉 보통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 본 보통 사람은 대략 이러했다.

 

살기는 너무 부자도 아니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을 것, 식구끼리는 화목하되 가끔 의견 충돌쯤 있어도 무방함, 부모가 생존해 계시되 인품이 보통 정도로 무던하여 자식에게 보통 정도의 예절과 공중도덕을 가르쳤을 것, 학력은 내 자식이 대학을 나왔으니 대학은 나와야겠지만 일류나 이류냐까지는 안 따지기로 하고 그 대신 적성에 안 맞는 엉뚱한 공부를 해서 대학을 나오나마나 이면 절대로 안 되고, 용모나 키도 보통 정도만 되면 되지만 건강할 것, 돈 귀한 줄 알고 인색하지 않을 것, 성품이 명랑하되 비리나 부조리에 분노하고 고민할 줄도 알 것, 등등이었다.

 

나는 그만하면 욕심을 너무 안 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사윗감은 쌔고 쌨으려니 했다. 그러나 웬걸, 막상 나서는 혼처는 하나같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사람을 넘지 않으면 처졌다.

 

내 딴엔 가장 흔한 보통사람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보통사람이 그렇게 귀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장 보통이라고 생각하고 내세운 조건은 어쩌면 가장 까다로운 조건인지도 몰랐다.

 

나는 우선 사돈을 맺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보통 가정을 내 둘레에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역시 귀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내 집은 남이 보기에 보통일까? 거기 생각이 미치자 그것조차 자신이 없는 게 아닌가.

 

우선 주부가 글을 쓴다고 툭하면 이름 석 자가 내걸리고, 살림은 건성건성 엉터리로 하는 가정이 어디 보통 가정인가. 나는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보통사람은 나에게만 어려운 게 아닌 모양이다. <보통사람>이란 TV 연속극이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을 때 나도 그걸 꽤 열심히 보았지만 그 사람들이 보통사람이라고 여겨지진 않았다.

 

그러나 보통사람이란 제목은 가장 광범위한 사람에게 동류의식을 일으켰음직하다. 전형적인 보통사람을 찾긴 힘들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보통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고, 또 그렇게 생각할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한 것 같다. 그것은 아마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서를 써오라고 할 때 생활 정도 란에 거의 '중'을 쓰는 심리와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어떤 일간지에서 평균치의 한국 사람을 계산해서 거기 꼭 들어맞는 사람을 찾아 내서 <한국의 보통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보도한 적이 있다.

 

나는 그가 크게 웃고 있는 낙천적이고 건강한 얼굴을 보고 내가 오랫동안 찾고 있는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과 친숙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갖춘 보통사람의 조건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사람의 조건은 일터당토 않은 것이었다.

 

그의 생활 정도나 학벌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 사람을 훨씬 밑돌았지만, 그는 보통 이상의 날카로운 사회적 안목과 비판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보통사람다운 점이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큰 욕심 안 부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보다 잘 살고 자식은 자기보다 더 많이 가르치고 싶다는 건전하고 소박한 꿈이었다.

 

그러나 한편 냉정히 생각해 보면 큰 욕심 안 부리고 노력한 것만큼만 잘 살아 보겠다는 게 과연 보통사람의 경지일까? 보통사람이란 좌절한 욕망을 한 장의 올림픽 복권에 걸고 일주일 동안 행복하고 허황한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닐까?

 

보통 사람의 숨은 허욕이 없다면 주택복권이나 올림픽복권이 그렇게 큰 이익을 올릴 수 없을 것이다. 이 풍진 세상에서 노력한 만큼만 잘 실기를 바라고 딴 욕심이 없다면 그건 보통 사람을 훨씬 넘은 성인의 경지이다.

 

그럼 진짜 보통사람은 어디 있는 것일까?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일까? 보통 사람이란 평균점수처럼 어떤 집단을 대표하고 싶어하는 가공의 숫자일 뿐, 실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크게는 안 바래요. 그저 보통 사람이면 돼요."

 

가장 겸손한 척 가장 욕심 없는 척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얼마나 욕심을 부렸는지 모른다. 욕심 안 부린다는 말처럼 앙큼한 위선은 없다는 것도 내 경험으로 알 것 같다.

 

아마 나의 가장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까다로운 조건만 내세워 자식들의 배우자를 골랐더라면 생전 시집 장가 못 보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제 마음에 드는 짝을 제각기 찾아 내서 부모의 승낙을 받고 슬하를 떠났으니 큰 효도한 셈이다. 아직도 보내야 할 자식이 남아 있긴 하지만 보통 사람을 찾는 일은 그만두기로 한 지 오래다.

 

서른 둘이 되도록 시집을 안 가고 있는 딸을 둔 내 친구는 보는 사람마다 붙들고 중매 서라고 조르는 버릇이 있다. "바지만 입었으면 돼" 그게 내 친구의 사윗감에 대한 간단 명료한 조건이다. 그러나 서른 두 살 먹은 그 처녀는 치마 입은 총각이나 나타나면 시집을 갈까, 바지 입은 총각들한테는 흥미 없다는 낙천주의자다.

 

나는 그렇게 초조해 하는 친구보다 그의 딸의 느긋한 여유가 한결 보기 좋아서 친구한테, 그 애는 결혼 안 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애니 제발 좀 내버려두라고 충고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친구는 벌컥 화를 내면서 보통 사람들이 다 하는 사람 노릇도 못하고 나서 행복 불행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렇담 내 친구는 행 불행이 이전의 최소한 사람노릇을 보통사람의 전형으로 삼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사람과도, 신문사에서 뽑은 보통 사람과도 다른 또 하나의 보통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보통 사람의 실체를 파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러다가는 내가 보통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정말인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모르겠다. 지금 누가 나에게 '보통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다면 이마에 뿔만 안 달리면 다 보통 사람이라고 대답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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