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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챙김의 글/시 한편의 여유

도종환 시인 가을시 모음 ‘가을사랑’ 외

by 늘해나 2022.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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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의 가을시 모음

 

'도종환 시인의 가을시 모음' 섬네일 이미지

 

 

 

가을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코스모스 이미지

 

 

다시 가을

 

- 도종환

 

구름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덜 관심을 보이며

높은 하늘로 조금씩 물러나면서

가을은 온다

 

차고 맑아진 첫 새벽을

미리 보내놓고 가을을 온다

 

코스모스 여린 얼굴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갸웃이 고개를 들면서

가을은 온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면서

스님들 독경 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가을은 온다

 

흔들리는 억새풀의 몸짓을 따라

꼭 그만큼씩 흔들리면서

……

너도 잘 견디고 있는 거지

혼자 그렇게 물으며

가을은 온다

 

 

 

가을비 내리는 풍경

 

 

가을비

 

- 도종환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했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숲에

잎들이 지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 사랑하고

오늘 낙엽 지는 자리에 남아 그리워하다

내일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바람만이 불겠지요

 

바람이 부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 그리워하며

한 세상을 살다가 가겠지요

 

 

 

떨어진 낙엽 위로 햇살 비추는 숲 이미지

 

 

가을 오후

 

- 도종환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물에 던지며

서 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었다

 

웃는 낯빛이 쓸쓸하여

풍경은 안단테 안단테로 울고

나는 가만히 가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지다

내 품에 머리를 기대오는

가을의 어깨 위에

나는 들고 있던 겉옷을 덮어주었다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나도 알고 가을도 알고 있었다

늦은 가을 오후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

 

 

밖에 나갔다 산방으로 돌아오는 가을 오후.

나를 가장 먼저 아는 체 하는 건 쓸쓸함입니다.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물에 던지고 서 있는 가을.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는 가을.

 

그 가을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으면 가을도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집니다.

가을이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질 때마다 추녀 끝에선 풍경소리 들립니다.

 

그러나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나는 압니다. 쓸쓸함이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키우는지 압니다.

 

이 세상에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 사람도 나무 한 그루도 내가 마주하고 선 고적한 시간도 늦게까지 남아 있는 풀꽃 한 송이도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들인지 알게 합니다.

 

나는 이 가을의 쓸쓸함과 만나는 시간이 좋습니다.

쓸쓸한 느낌, 쓸쓸한 맛, 쓸쓸한 풍경, 쓸쓸한 촉감이 좋습니다.

나도 쓸쓸해지고 가을도 쓸쓸해져서 가을도 나도 착해질 수밖에 없는 이 순간이 좋습니다.

 

- 도종환 '시인의 엽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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