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국 단편소설 <우상의 눈물>
합법적 권력의 폭력과 위선… 그 정체를 밝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동물원 우리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성공한 학창 시절 친구의 조롱하는 눈빛, 가난한 노파의 눈물, 굶주린 어린 아이의 모습.
이 모든 것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에서
개정전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안톤 슈나크의 글이다. 명문장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수필은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크고 작은 슬픔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 내고 있다.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원인은 매우 다양하겠지만 대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부정적인 사건이나 인간의 믿음과 신뢰가 깨어지면서 그 내면에 숨겨진 위선을 발견했을 때 깊은 슬픔을 느낀다.
내가 이 수필을 처음 접한 것은 전상국의 소설 ‘우상의 눈물’에서였다. 주인공이자 악의 화신 기표가 ‘우상’으로서의 위상이 무너지고 동정의 대상이 되어갈 때 읽고 있었던 글이다. 여기서 작가가 제시하고자 하는 슬픔의 정체는 무엇일까.
1970년대 말 한 도시의 남자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우상의 눈물’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합법적인 권력(폭력)의 위험성과 위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소설이다.
작품의 주인공 최기표는 일말의 동정심과 죄책감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악의 화신이었다.
아무도 그의 권위와 카리스마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새 학기가 되면서 담임선생님이 ‘우리’를 위한 획일적인 결속을 강조하면서 그 명성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반장과 담임의 ‘기표 길들이기’는 치밀하고 차근차근하게 실현된다. 기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반장과 담임은 따뜻한 호의로 일관한다. ‘신을 돋보이기 위한 일에 순수한 악마를 이용’한다.
기표의 낙제를 막기 위해 반장은 오월 고사에서 답지를 보여 주자고 제안하고 기표의 거부로 이 사실이 발각되자 반장은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선다.
이 일로 반장은 기표에게 밉보여 무서운 린치를 당한다. 전치 2주의 상해를 입고 응급실로 실려 가지만 반장은 끝까지 상대를 입에 올리지 않으면서 학교에서 일약 영웅이 된다.
사흘이나 결석을 하고 담임의 노력 끝에 다시 학교에 나온 기표는 악마의 깃털이 한 움큼 빠진 채 풀이 죽어버린 존재로 변질돼 있었다. 이때 기표가 읽었던 책이 바로 처음에 소개했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었다.
이제 반장과 담임의 기표 길들이기는 정점으로 치닫는다. 그것은 기표의 불우한 가정환경을 미화시켜 모두가 그를 동정하게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이는 신화적 존재로 군림해 온 기표를 빈곤이라는 족쇄로 옭아매려는 의도였다.
기표는 이제 판잣집 냄새 나는 어둑한 방에서 라면 자락을 허겁지겁 건져 먹는 한 마리 동정받아 마땅한 벌레로 변신됐으며 기표를 돕기 위한 재수파의 매혈 행위도 협동과 봉사의 기여 정신의 산증인으로 부각된다.
기표의 얘기가 영화로 만들어지게 된 어느 날 담임은 기표가 집을 나간 뒤 걱정돼 교무실로 찾아온 기표의 어머니를 내쫓으며 오히려 영화사와의 약속을 걱정하며 격분한다. 기표는 한 장의 쪽지를 써놓고 사라진다.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는 말을 남긴 채.
기표가 느낀 무서움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자신의 약점을 왜곡하고 과장해 무력하게 만들려는 담임과 반장의 주도면밀한 위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담임과 반장은 겉으로 기표를 구원하기 위한 순수한 마음과 따뜻한 호의를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기표의 날개를 꺾으려는 위선적인 행동을 보인다.
그들은 기표의 입장에서 그가 가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려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담임은 반을 주도하기 위한 지배욕에서, 반장은 반을 통솔하기 위해 그를 무력화시키려 철저히 계산된 선행을 한 것이다.
기표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수치심을 일으켜 자신의 세계에서 몰아낸 그들의 행동에서 우리는 숨겨진 폭력의 무서움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다수를 위해 소수의 개인이 희생돼도 좋다는 사고방식은 전체주의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 담임과 반장이 덧씌운 가짜 이미지 속에서 기표는 두려움에 떨며 슬픔을 느낀 것이다.
작품에서 그려낸 학교의 합법적 폭력의 문제는 이제 많이 사라졌다. 기표가 행사했던 물리적인 폭력도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우리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는 더욱 치열해진 경쟁 구조에 있다.
아직도 대다수의 학생들이 서열화된 학교에서 성적으로 인한 크고 작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지친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키우며 다양성을 인정받고 존엄성을 인정받는 분위기가 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너’와 ‘나’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상생과 공존의식이 자리잡아야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사회 문화가 정착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 곳곳에서 합법과 배려를 가장한 위선자들에 의해 상처받고 눈물 흘리는 제2, 제3의 기표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 자료출처 : 조선일보 [책으로 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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